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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1. 11世 〉15. <부정공>연담기(蓮潭記)휘이(諱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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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부정공>사의휴재공휘정묘갈명(司議烋哉公諱玎墓碣銘)
司議烋哉公諱玎墓碣銘 公諱玎字可玉烋哉其號也趙氏之籍玉川高麗光祿大夫檢校大將軍門下侍中諱璋爲上祖三傳之諱元吉玉川府院君諡忠獻生諱瑜官至中顯大夫典農寺副正高祖諱智崗宣畧將軍忠武衛司果曾祖諱琛 中宗乙亥別試文科内歷翰林祖諱忠貞考諱瑞龍官成均進士妣羅州丁氏左贊成贈領議政諡忠靖公應斗女公生於生父諱天祥自幼英姿秀朗特有異質賦性純實志節剛直智勇非凡事親以孝敬長以禮早就傳受學尤勤尤篤孔仁孟義恒服師訓玩研經史無不貫徹上天下鑑蔭除司議時値壬辰倭侵憂國之心奮發切齒抗賊衆寡不敵故手持長劍赴高霽峰錦山之役協贊軍務隨時臨戰怒氣衝天一輝長劍大喝一聲目子盡裂推擊賊徒左衝右突近按賊醜死之者數十級敗退者大驚失色莫敢抗拒反目相視曰前後未見忠義節士擊節嘆賞以是多有斬獲之功貞忠高節有光靑史又見於湖南倡義錄其後湖南士林欽慕其忠義擇吉建祠玆擧縟儀敬薦精禋墓在住巖洞生家祖考墓下艮原配淑夫人潘南朴氏應寅女墓合祔噫公之沒已過三百餘年尚闕阡刻其後孫鉉秀深恨其先祖智勇義節貞忠無徵屢屢請刻於余終不獲於辭謹敘其行錄次世系源流繼之以銘曰以孝事親以禮敬長孔仁孟義恒服師訓玩硏經史無不貫穿義節剛直智勇非凡時値壬亂一揮長劍逐出賊醜扶安社稷貞忠高節有光竹帛銘以昭之可徵千霜 歲光復後初 戊寅五月上旬 羅州 丁性杓 謹識 사의휴재공휘정묘갈명(司議烋哉公諱玎墓碣銘) 공의 휘는 정이요 자는 가옥이며 휴재는 그 호이시다. 조씨의 본은 옥천이니 광록대부 검교대장군 문하시중 휘 장으로 상조를 삼다. 삼전의 휘 원길은 옥천부원군인데 시 호는 충헌이었으며 아들의 휘는 유인데 벼슬은 중현대부 전농시부정이요 고조의 휘는 지강인데 벼슬은 선략장군 충무위사과요 증조의 휘는 침인데 중종 을해(中宗乙亥)에 별시문과로 벼슬은 내력한림이시다. 조의 휘는 충정이며 고(考)의 휘는 서룡이신데 성균진사요 비(妣)는 나주정씨 좌찬성 증영의정 시(諡)충정공 응두의 딸이시다. 공(公)이 생부(生父) 휘 천상(天祥)의 슬하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특한 자태가 명랑하고 특별한 소질이 있어 성품이 순진하여 지조와 절개는 강직하고 지혜와 용맹은 범인(凡人)에 뛰어났으며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예절바르며 일찍 스승을 쫓아 수업할 제 더욱 부지런하고 더욱 돈독히 하여 공맹(孔孟)의 도를 스승에 법 받았으며 사서오경을 깊이 해득하여 통달치 않음이 없었도다. 위로 하늘이 굽어보시고 임금의 넒은 사랑으로 사의(司議) 벼슬을 받으셨는데 그때 임진(壬辰)왜란을 만나 나라를 근심한 마음이 분발하여 어금니를 깨물고 적병에 대항 하였으나 적은 군사로 많은 적병을 대적할 수 없기에 손에 장검을 비겨들고 고제봉(高 霽峰) 금산싸움에 다가가 군무에 협찬하고 때로는 전장에 임하여 노기충천하여 장검을 휘두르고 큰 소리로 호통을 치니 눈시울이 다 찢어지는지라. 적군을 추격하여 좌충우돌하니 접근하는 적의 무리 죽는 자 수십 열(列)이요 도망치는 적의 무리 크게 놀라 넋을 잃고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눈을 돌려 서로 쳐다보고 말하기를 전후에 보지 못했던 충의절사라고 손뼉을 치며 찬탄해 마지않았다. 이러므로 많은 참획(斬獲)의 공이 있어 곧은 충성과 높은 절개가 역사에 빛나고 또 그 사실이 호남창의록에 기록되었다. 그 후에 호남 사림(士林)이 그 충의를 흠모하여 좋은 터를 가려 사당을 세우고 이 훌륭한 업적을 길이길이 빛내기 위하여 해마다 경건히 제사를 올리고 있다. 묘(墓)는 주암골 생가(生家) 조고 산소밑 간좌(艮坐)이며 배(配)는 숙부인 반남박씨로 응인의 딸인데 묘는 합부(合祔)하였다. 아, 가엾도다. 공(公)이 서거하신지 어언 三百年이로되 지금껏 묘비를 갖추지 못하여 그 후손 현수 그 선조의 지용(智勇)과 절의(節義)와 정충(貞忠)이 길이 전하지 못할까 깊은 한이 되어 몇 번이나 나에게 빗돌에 새길 글을 청하기에 끝내 사양치 못하고 삼가 그 행록을 살피고 또 세계(世系)의 원류(源流)를 새기노니 왈, 효도로서 어버이를 섬기고 예절로 어른을 공경하다 공자의 인과 맹자의 의를 항상 스승에 법 받았도다. 사서오경을 깊이 해득하여 꿰뚫지 않음이 없었도다. 의절은 강직 하고 지용은 비범하였도다. 임진왜란을 만나 장검을 휘두르다 왜적을 몰아내고 사직을 안보하였도다. 정충고절은 역사에 빛났도다. 빗돌에 새겨 밝히니 가히 천만년 전하리. 광복후 무인오월상순에 나주 정성표 삼가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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